신응태(申應泰, 1643〜1728)는 청주 미원에서 활동한 학자로 충혜왕 때 안렴사를 지낸 퇴재(退齋) 신우(申祐)의 11대손이며 충효를 겸전한 양일당(養一堂) 신지익(申之益)의 손자이다. 효자 신심(申轉)의 아들이며효자 신협(申鋏)의 종질(從嫉)이다. 효문에서 태어나 어질고 효성스런 행실로 향유들의 신망이 높았다.
신응태는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성품과 행실이 높고 뛰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조부를 여의었지만 집상(執喪)의 의젓함이 성인과 같았다. 조금 자라서는 조모와 모친을 지극히 봉양하는 한편 사서를 읽으며 정미한 뜻을 구하였다. 부친의 명을 받들어 19세에 처음 과장에 들어갔고,문학을 일찍 성취하여 20세에 연이어 두 과방에 참여하니 만주(晩洲) 홍석기(洪錫箕)가 시권을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 후 대소과 초시에 여러 번 입격하였으나 시운이 돌보지 않아 향리의 처사로지냈다.
25세에 회덕에 가서 우암 송시열을 뵌 후로 화양동과 회덕을 왕래하며 강문(講問)하였고,『주서절요(朱書節要)』와『근사록(近思錄)』을읽고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42세에 비로소 과업을 폐하고 화양동에 들어가 스승 송시열에게 집지(執贊)의 예를 올리고 오로지 성리학에 전념하였다.1) 학력(學刀)이 순수하고깊으며 조예가 정밀하였고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이렇듯 학업은 밝게 빛나고기절은 높아 스승 송시열이 특별히 추천하여 인정하였다. 그런 까닭에 김창협(金昌協)은 일찍이 ‘우암의고제(高弟)’로 추숭하였고,권상하(權尙夏)는 ‘일대의 선사(善士)’라 하였으며, 이수언(李秀度)은 ‘사람됨이 충후하고순수해서 고인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신응태는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를 지극히 섬겼고,『선세사실(先世事實)』을 엮는 등 계술(繼述)의효를 다하였다. 또한 문학에 소질이 있어 칭찬과 인정을 받았고,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글을 정밀하게 연구하여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역학(易學)•천문(天文)•역수(曆數)에도 밝았다. 만년에는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고타고난 문장으로 비록 다작은 아니지만 시문도 적잖이 남겼다. 본고는 그가 남긴『용애집(龍唐集)』을 통해 조선후기 학자이자 문인인 신응태의 삶과 교유,그리고시세계의 일단을 살펴 학계에 소개하는 기회로삼고자 한다.
2. 생애와 교유
1》생애
신응태申應泰)는 자(字)가 길래(吉來)2) 호(號)는 용애(龍唐)이며 본관은 아주(韻洲)이다. 고려말 혼탁한 세상을 피해 경북 의성(義域)에 퇴거한 안렴사(按廉使) 신우(申藏)가 그의 11대조이다. 이후 대대로 선조들이 살았던 의성으로부터 청주 문박리(文博里)3)로 이거한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 신간(申幹,?〜1539)4)이 그의 5대조이다. 고조는 신천령(申千齡)이고 증조는 문행(文行)이있고 성품이 강직했던 생원 신노(申樓,1553〜1590)5 6)이다. 조부는 학행과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참봉 양일당(養一堂) 신지익(申之益,1588〜1649)的)이다. 부친은 천성이 순하고 행의(行義)로스스로를 지키며 효성이 깊었던 처사 신심(申鐔, 161∼1647)8)이고모친은 광주반씨(光州潘氏) 반봉익(潘鳳翼)의 딸이다.
신응태는 1643년(인조 21) 청주 산동면(山東面) 송곡리(松谷里)9)에서태어났다.10)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성품과 행실이 높고 빼어났다. 5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7세에 조부상을 당하였다. 8세(1650년)에 비로소송곡공(松谷公) 신응사(申應泗)1)에게 배웠다. 12세인 1654년조모 평강전씨(平康全氏)12)를 모시고 괴산에 가서 감역공(監役公)13)으로부터 선조 안렴공[申祐]의 효행사적을 듣고 돌아와 후에 <선세사실(先世事實)>을 완성하였다.
13세에 맹자와 중용을 읽었다. 정미한 뜻을 이해하고자 송곡공에게 질문하니 매우 기이하게여겼다. 17세에 산방에 들어가 가정공(佳亭公)14)과 함께 논어를 읽었다. 19세에 처음 과장에 들어갔고 20세인 162년 풍산김씨(豐山金氏)를 아내로 맞으니 첨지 김시좌(金時佐)의 딸이다. 그리고 이해 향시에 입격하였다. 문학을 일찍 성취하여 연이어 두 과방에 참여하니 시골의 오랜 친구들이 영광스러워하였다. 이때 만주(晩洲) 홍석기(洪錫箕, 160∼1680)가 와서 시권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또한 겨울에 주역을읽었다.
25세에 회덕에 가서 우암(尤庵)·동춘(同春) 두 선생을 뵈었다. 이듬해 7월조모 전씨 상을 당하였다. 27세인 169년 주서절요(朱書節要)를읽었고, 29세인 1671년 홍석기에게 조부 양일당공과 부친처사공의 사적을 적어 보내며 아울러 쌍죽도(雙竹圖)에 시를지어 달라고 청하여 오언시 10운을 받았다.15) 한편 화양동으로우암 선생을 찾아뵈었다. 30세인 1672년 여름, 괴산소마사(小馬寺)16)에서과거 문장을 공부하였고, 별시 초시에서 부(賦)·책(策)으로 입격하였으며, 식년 초시에서 또 입격하였다. 그리고 회덕에 가서 동춘 선생을 곡하고우암 선생을 뵈었다.
1673년 2월 회시(會試)에 낙방하였다. 모친의 병이 깊어 과거를 보지 않으려 했으나 모친이 권하여 부득이 본 것이다.과거를 보고 돌아와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 슬픔이 지나쳐 반나절을 기절하였다.
1674년 곽세건(郭世楗)이 송시열을 모함하자17) 스승의무고를 변론하는 논설을 지었다. 1675년 덕원(德原) 적소에 계신 우암 선생께 편지를 올렸다.18) 1675년 1월, 사사했던 송곡공상을 당하자 자신을 생장시킨 스승의 의리로써가마(加麻)하였다.1679년 주서절요(朱書節要) 와 근사록(近思錄)을 순환하며 읽고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2권을 만들었다. 38세인 1680년묵방(墨坊)19)에 계신 우암 선생을 찾아뵈었다.20) 1681년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뵙고 겨울에 또 우암 선생을 뵈었다. 이듬해 봄에도 우암 선생을 뵈었다. 41세인 1683년 농계(聾溪) 이수언(李秀彦, 1636∼1697)에게 편지를 보내 조부와 부친을 현양하는일을 갖추어 말하였다. 이해 5월 이수언이 회계(回啓)하였고 10월 임금의특명으로 정포(旌褒)되었다.42세인 1684년 4월, 과거의 생각을 끊고 드디어 우암 선생께 집지(執贄)의 예를 올리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85년 3월에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뵙고 양일당의 묘표를 청하였다. 이때화양동에서 하루 머물며 파곶(巴串)에 모시고 가서 놀다 돌아와환장암(煥章庵)에서 잤다.4월에 권상하(權尙夏, 1641∼1721)·김창협(金昌協, 1651∼1708)을 만나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뵈었다.21)
1686년 9월 화양동에 가서 우암 선생을 뵈었다. <선세사실(先世事實)>이 편집되어 스승께 보여 드리고 명명(命名)과 아울러 권두의 글을 청하기 위함이었다. 송시열은 서수(書首)에 ‘아주신씨선세사실(鵝洲申氏先世事實)’이라쓰고 권말에 발문을 써주었다. 1687년 화양동에 가서 우암선생을 뵈었다. 이때가 스승 생전 마지막이었다. 47세인 1689년 제주 적소에 있는 우암 선생께 편지를 올렸다. 5월 송시열이제주로부터 상경하라는 명을 받자 천안에 가서 기다리다 드디어 대궐에 나가 스승을 신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전달되지 못하였다. 6월 스승이 정읍에서 후명(後命)을받자 연산(連山)에서 곡하며 맞이하고 상여를 따라 수원에이르러 글을 지어 제사 드리고 병이 나 집으로 돌아왔다.
48세인 1690년 산방에 들어 독서하였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산방으로피해 동방 제현의 문집을 모아 그 긴요한 것을 간추려 1권으로 만들어 때때로 펼쳐보다 몇 달 만에 돌아왔다. 그후 용애(龍崖)로 이거하고인하여 호로 삼았다.
1693년(51세) 민박사(民朴寺)2)를 중건하였고 1694년 3월부인 김씨 상을 당하였다. 4월 우암 선생 복관(復官) 치제(致祭)에 시를 지었고, 1695년 만경대서원(萬景臺書院)이완성되어 시를 지어 원장[권상하]에게 올리고 여러 친구에게보였다. 5세인 1697년 이수언을 곡하였다. 이수언과는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이수언은 일찍이 신응태의 문장을 칭찬하여, “당세의 전형이어서 적수가되기 어렵다.”고 하였다.
1703년(61세) 12월 장암(丈巖) 정호(鄭澔, 1648∼1736)를방문하였고,24) 1704년(62세) 신종 황제 제사를 청하는 상소를 썼으나 올리지 못하였다.25) 1705년(63세) 2월 문산(文山)에 가서 이기홍을 방문하여 <선세사실(先世事實)> 발문을 받았다.26)6세인 1708년 이기홍과 김창협의 부음을 들고 곡하였다.1710년(68세) 2월 김정구(金鼎九)의 효행에 관한 글을 세 번 올렸다.27) 1710년(69세) 3월가정공을 곡하고 1716년(74세) 1월 <화양서원선액기(華陽書院宣額記)>를지었다. 75세인 1717년(숙종 43) 3월, 임금이온천에 행행 시 조부 양일당의 사적을 적은 글을 올렸다. 1719년(77세) 사서제요도(四書提要圖)를권상하에게 올리고 수정을 청하였다.
1721년(경종 1) 권상하의 부음을 듣고 곡을 하고, 순찰사에게 정유년 온양 행차 시에 상께 올린 말에 기초하여 양일당 현양의 일을 올렸다. 82세인 1724년 여름에 병이나 넉달을 병석에 있었는데 장자 상록의부인 이씨가 극력 구완하니 사람들이 모두 효부라 하였다. 1728년<사론시비옥하사담(士論是非屋下私談)> 1권을완성하니, 동서분당부터 신임사화까지 피차 사정득실(邪正得失)의 본말을 통쾌히 논변한 것이다. 6월에 병이 나 8월 15일 86세로 송곡(松谷)에서 생을 마쳤다.28) 문인송윤상(宋允相)·정후기(鄭垕基)·신홍찬(申弘燦) 등이글을 지어 제사지냈고, 청주 검암서원(儉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부인 풍산김씨와의 사이에 육남(六男)을 두었으니, 상전(尙籛)·상록(尙籙)·상첨(尙籤)·상주(尙籒)·상범(尙範)·상림(尙箖)이다.29)
신응태는 조부와 부친이 모두 효행으로 정려된 효문의 후손답게 타고난 효자였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조부를 잃고도 조석제전(朝夕祭奠)에 성인 같은 의젓함을 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특히평소 기가 허한 모친을 위해 조섭에 세심하였고 위급에 미쳐서는 단지(斷指)하였으며 마침내 돌아가시자 애훼(哀毁)가 극에 달아 예를 넘어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러도 여막을 떠나지 않고 거상(居喪)을 거두지 않았다. 또한그의 효행은 계지술사(繼志述事)로 드러난바,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과업에 힘쓰고 평생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조사실기(先祖事實記)를 완성하고 조부와 부친의 행적을 현양하기 위해 노력한것이 그것이다.
신응태는 학문을 좋아한 천생 학자였다. 부친의명으로 과장에 출입하여 대소과 초시에 일곱번 합격하고도 시운이 돌보지 않아 이룬 바는 없었으나 그 또한 개의치 않았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과거를 폐하고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대개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당리무사(當理無私)’30) 네 글자를 평생 공부로 삼았고, 스승 송시열의 글[宋子之書]을가장 좋아하여 동정어묵(動靜語默)에 한 가지로 법 삼았다.31) 또한 남는 힘으로 글을 배우며 문단에서 노니니 문장이 아름다웠다. 대개그 처음 뜻이 초월함을 벗어 나고 화려함을 씻어내며 오로지 실지(實地)에뜻을 두었다.
신응태는 청빈자수(淸貧自守)한 선비였다. 생계를 세우려 하지 않았고 재물과 이익에 대한 이야기는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화양(華陽)의 고족(高足)이 되어동문 한수(寒水)·농암(農巖)·농계(聾溪)·직재(直齋) 등 제현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용애 선생(龍崖先生)으로 일컬어졌으며 만년에 문인들이 사사하니 후학을 양성하는 보람이 있었다.
신팽령은 樑•樓두 아들에게〈梅席訓子從學te>을 써주었다. 申應泰, <書曾祖考生員府君所寫朱文公訓子從學帖後>, 龍崖集 권3 참조.
6) 申之益(158∼1649): 자는舜擧 호는 養一堂이며 시에 능하였다. 이득윤의 문인으로 성품이 강직하여 광해군 때 두번이나 상소하여이이첨의 죄를 논핵하였다. 冶溪에 정사를 짓고 程子의 ‘涵養吾一’의 말을 취하여 ‘養一’로편액을 거니 이득윤의 玩易齋와 더불어 구름과 안개처럼 서로 접하여 왕래하며 종유하였다. 孝廉으로 추천되어朝散大夫 永崇殿參奉을 제수 받았다. 아들 鐔과 그의 從弟 鋏이 모두 효자로 효종 조부터 숙종 조에 이르기까지청주에서 兩世 三孝의 사적을 올려 모두 정려되었다. 光海君日記,13년(1621) 윤 2월 8일, 12일자와 宋時烈, <永崇殿參奉申公墓表>, 宋子大全 권196 참조.
7) 165년(효종 6) 申鋏, 1683년(숙종 9) 申之益·申鐔이 효행으로 정려되었다. 1703년(숙종 29) 三孝를합설하여 三孝閭를세웠고, 丈巖 鄭澔가 <三孝事實記>를 지었다. 그 후 1762년중수하였고, 송시열의 현손 宋可相이 <三孝閭重修記>를지었다. 申鋏(1617∼1691)은자가 子長 호는 松坪으로 신지익의 중형 申之仁의 아들이다. 청주시 미원면 가양리 솔골에 三孝閭가 있다.
8) 申鐔(161∼1647): 자는 士佩이다. 병자호란 때 부모를 모시고 산중에 피하는 중 갑자가 적병을 만났는데 자신의 몸으로 부모를 막고 슬피 울면서살려줄 것을 청하니 적도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 병에 斷指하여 구완하였다. 생부는 신지익의 백형 申之亨이다.
9) 현재 청주시 미원면 가양리 솔골[松洞] 마을이다.
10) 이하 생애는 <年譜>·<行錄>·<墓表>를 참고하였다.
11) 申應泗(1630∼1675): 자는源魯 호는 松谷이다. 문장이 훌륭하고 예학이 고명하였으며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養幽齋 李萬濟·晩洲 洪錫箕와 道義의 교분을 맺었고 시에 능하였다. 신응사는 신응태의四從兄(생가로는 三從兄)이다.
12) 조모는 平康全氏 全有亨(156∼1624)의딸이다. 전유형은 괴산의 유생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청안현감에 임명되었고 광해군 즉위 후 광주목사·형조참판등을 지냈으며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24년 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했다는무고를 받아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1742년 괴산의 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鶴松集이 있으며 시호는 義敏이다. 平康全氏派譜 참조.
13) 全 (1602∼166)이다. 자는 謙汝 호는 止善으로 전유형의 삼남이다. 四山監役을 지냈고 효행으로호조정랑에 증직되고 정려되었다. 전습은 이때 괴산에 살고 있었는데, 신응태에게三綱行 속의 雙竹圖를 보여주며 안렴공[申祐]의 효행에 관한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4) 申應涑(1645∼171): 자는德叟 호는 佳亭으로 송곡 신응사의 아우이다.
15) 이때 받은 시는 龍崖集에도 홍석기의 晩洲遺集에도 없다.
16) 小馬寺는 괴산 普光山에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권14 槐山郡.
17) 송시열은 1674년 8월 현종이 승하하자 숙종의 명에 따라 현종의 誌文을 짓기 위하여 상경한다. 그런데도중에 영남유생 郭世楗의 상소가 올라오자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肅宗實錄, 즉위년(1674) 9월 2일, 25일자.
18) <年譜>에는 갑인년(1674)으로 되어 있으나 수정하였다. 송시열이 함경도 덕원에 유배된것은 1675년 1월이다.
19) 현재 청주시 미원면 내산3구 墨坊마을이다.
20) 이른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송시열 또한 거제 유배에서 풀려났다. 화양동으로들어가려고 묵방 洪冑炳의 집에서 쉴 때 신응태가 가서 뵙고 홍주병과 함께 스승을 모시고 靑川에 갔다가돌아왔다. 홍주병(1654∼?)은 자가文伯 본관은 南陽이다. 아우 洪冑亨·洪冑華와 함께삼형제 모두 송시열의 제자로 華陽淵源錄에 이름이 올라 있다.
21) 近思錄 가운데 글의 뜻이 의심되는부분을 스승께 질문하였다. 황강과 농암이 함께 모시고 앉아 있었고, 수일을머물며 心經의 의심나는 곳을 강독하였다. 이때 김창협이, “이사람은 文詞가 성실한 門下의 高弟”라고 하였고, 권상하는, “학문의 힘이 순수하고 깊으니 가히 일대의 善士”라고 하였다.
鼎三·생원 鼎一이다.청주시 미원면 미원리에 효자정려가 있다. 28) 신응태의 묘소는 청주시 미원면 가양리 산 6-1에 있다.
2) 교유
신응태가교유한 인물은 대부분 우암 송시열에게 배운 동문과 동향의 향유들이다. 홍석기는 일찍이 8세 무렵 신응사를 사사할 때부터 만난 듯하다. 앞서 살펴본바 신응태는이때 비로소 송곡공 댁에 가서 공부를 시작했고, 신응사와 홍석기가 도의로 교분을 맺은 사이였으니32) 두 사람이 왕래할 때 자연스럽게 뵈었을 것이다. 그 후 신응태가문학을 일찍 성취하여 20세에 연이어 두 과방에 참여하였고, 이때홍석기가 와서 시권을 보고 크게 칭찬한 일이 있었으니, 신응태는 어려서부터 홍석기에게 시도 배웠을 것이다. 1671년 3월에는 홍석기에게 편지를 보내며33) 시를 청하여 받기도 하는 등 신응태에게 홍석기는 스승과 같은 존재인데, 특히시문에 조예가 깊었으니 평소 사백(詞伯)으로 모신 듯하다.34)
이수언35)과는 지기지우로 매우 가까운 사이다. 이수언은 이색의 12대손으로 고조 때부터 선조들이 청주 묵계(墨溪)36)에서 살았다. 그 또한 선조들의 터전을 이어받아 묵계에 집을짓고 살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수언은 1674년곽세건(郭世楗)이 스승 송시열을 모함하자상소하여 그를 논척한일로 체직되었고, 이듬해인 1675년 체환되었으나 당시 전라도관찰사로나가 있던 부친이 그해 겨울에 돌아가시자 고향 청주 묵계로 돌아와 세사에 뜻을 끊었다. 그 후1680년 다시 벼슬길에 나가기까지 5년 동안 고향집에 머물렀다. 이수언은 이때 고향 판교(板橋, 미원)로 돌아와 검단산 아래에 후운정(後雲亭)을 짓고 말년을 보내고 있던 홍석기를 시 스승으로 모시고 묵계와 미원 단계(丹溪)를 오가며 시교(詩交)에힘썼다.37)
문집에는이수언에게 준 시가 5수 있는데, <차운정묵계(次韻呈墨溪)> 3수 중 첫 번째 시38)를 통해 이수언과의 교유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시는 1674년 체직되어 떠나는 이수언을 이별한 후 1675년 겨울 벗이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납매(臘梅)를 들고 이수언이묵계에 마련한 집을 찾아가 술잔을 나누며 새롭게 사귀는 정에 보답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둘 사이의 교유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된 것이지만, 이수언이 고향에 머무는 5년 동안본격적인 시교(詩交)가이루어진 듯하다. 앞서 얘기했듯 이수언 또한 이 시기에 홍석기를 시 스승으로 모시고 묵계와 단계를 오갔기때문에 미원 스승 댁에서 세 사람이 함께 만나는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이수언은 신응태의 문장에 대한칭찬을 아끼지 않았고,39) 이후로도 신응태는1683년 이수언이대사헌으로 있을 때 편지를 보내 조부와 부친을 현양하는 일을 의논하는 등 집안의 대소사도 함께 나누었다.
권상하·김창협과는 43세인 1685년 1월화양동에서 만난 후로 3월과 4월에 서로 만나 화양동에 가서우암 선생을 함께 뵈었다. 김창협은 신응태를 ‘우암의 고제[尤庵之高弟]’로 추숭하였고, 권상하는 ‘일대의 선사[一代之善士]’라하였다. 신응태는 1719년(7세)에 사서제요도를 권상하에게 올리고 수정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기홍과는 1701년 그가 청풍부사로 있을 때 직접 방문할 정도로교의가 매우 깊었다. 1705년(63세) 2월에는 연풍(延豐) 문산(文山)에 가서 <선세사실(先世事實)> 발문을 받기도 하였다. 앞서 살펴본바 이기홍은 문산에 수락정(壽樂亭)을 짓고 권상하·정호 등과도 교유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때 신응태도 이기홍의 수락정에서 이들과 한두 번은 어울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기홍은 신응태가 향곡의 선비인 까닭에 세상에 드러나지 못함을애석하게 여겼다.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알건 알지 못하건 길래(吉來)에게 있어 무슨 손익이 있으랴. 나는 길래에게 감탄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암(旅庵) 강흡(姜洽, 1602~1681)40)과의 교유도 엿볼 수 있다. 강흡은 병자호란이후 태백산에 은거하여 심장세(沈長世)·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일컬어진다. 문집에신응태가 강흡에게 올린 시가 2수 있다. <봉정여암적소(奉呈旅庵謫所)>는 강흡이 유배중일때 적소에 올린 것이고, <여암방환후봉정일율(旅庵放還後奉呈一律)>은 해배되어 돌아온 후 율시를 지어 올린 것이다. 신응태의지기인 이수언 또한 일찍이 강흡과 교유한 흔적이 있는데,41)이로 보면 세 사람이 함께 교유했을 가능성도있고, 아울러 신응태와 이수언의 교유 시기도 좀더 앞당겨 질 수 있다.
끝으로문집에 있는 매화와 국화를 소재로 한 시를 통해 송동과 가까운 가양리 수락동에 살았던 양유재(養幽齋) 이만제(李萬濟, 1628∼167)와는시교(詩交)가 빈번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김정일(金鼎一)에 대한만시는42) 두 사람이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